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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조선 개항과 근대화의 역사: 변혁의 시대 속 한국사

by urongstory 2025. 6. 1.

19세기 후반 조선은 강화도 조약을 통한 개항부터 동학농민운동까지 격동의 근대화 과정을 겪었습니다. 흥선대원군의 쇄국정책에서 고종의 개화정책으로의 전환, 임오군란과 갑신정변을 통한 정치적 혼란, 그리고 열강들의 치열한 각축 속에서 조선은 전통사회에서 근대사회로의 급격한 변화를 경험했습니다. 이 시기는 조선이 외세의 압력과 내부적 모순 속에서 자주적 근대화를 모색했던 중요한 전환점이었습니다.


1. 개항 이전 조선의 상황과 배경

19세기 중반 조선은 흥선대원군의 강력한 쇄국정책 하에서 서구 열강의 침입을 막아내고 있었습니다. 대원군은 "외척의 세도에 의한 국정의 혼란과, 삼정의 문란에 의한 민생의 파탄으로 민란이 빈번하게 일어났으며, 밖으로는 서양 세력이 중국과 일본의 문호를 개방시키고 조선으로 몰려오는 상황"에서 집권하게 되었습니다. 대원군은 대내적으로는 왕권강화정책을 추진하면서 안동 김씨 등 외척 세력을 제거하고 서원을 대폭 정리하여 600여 개소를 철폐하고 47개소 만을 남겼습니다.

 

대원군의 개혁정책은 전제왕권 강화와 민생안정을 동시에 추구했습니다. 그는 "토지 대장에 오르지 않은 땅을 찾아 내어 토호들의 토지 겸병을 금지하고, 부분적이기는 하나 양전을 실시하여 전정을 바로잡으려 하였다"며, "종래 상민에게서만 징수해 오던 군포를 양반에게서도 징수하는 호포법을 실시하였고, 지방 수령과 토호의 농간이 가장 심했던 환곡제를 사창제로 개혁하였다"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경복궁 중건 과정에서 당백전 발행으로 인한 물가 상승과 원납전 징수 등으로 양반과 백성 모두의 반발을 샀습니다.


2. 강화도 조약과 조선의 개항

1873년 대원군이 하야하고 고종의 친정이 시작되면서 조선의 대외정책에 변화가 나타났습니다. 일본은 이미 메이지유신을 통해 근대국가로 발전하여 "조선과의 근대적 국교 관계를 맺기 위해 교섭해 왔다"고 합니다. 일본은 운요호사건을 계기로 군사력을 동원한 강력한 압박을 가했고, 조선 내부에서도 "박규수, 이최응, 이유원 등 소수의 개항론자들의 의견을 고종이 수용한 것을 바탕으로 개항을 전격 결정했던 것"입니다.

 

1876년 2월 26일 강화도에서 체결된 조일수호조규는 조선의 본격적인 개항을 알리는 신호탄이었습니다. 이 조약은 "원산·인천의 개항, 일본의 조선 연안 측량권 및 영사 재판권 인정 등을 내용으로 하는 12조로 된 조약"이었으며, 특히 제1조에서 "조선은 자주독립국"이라고 규정하여 청나라와의 전통적 종속관계를 부정하려는 일본의 의도가 담겨 있었습니다. 조약 체결 이후 조선은 1876년 부산, 1879년 원산, 1880년 인천 등 3개 항구를 개항하게 되었고, 이어서 미국을 비롯한 서구 열강들과도 연이어 통상조약을 체결하게 되었습니다.

 

강화도 조약 이후 조선 정부는 적극적인 개화정책을 전개했습니다. 고종은 "군제개혁에 관심을 기울여, 과거의 구식 군대인 5군영을 무위영과 장어영의 양영으로 개편하고, 일본식 군제를 도입하여 교육받은 신식군대인 별기군을 조직하였다"며, 행정기구 개혁도 단행하여 "청나라 정부의 총리아문 기구를 모방한 통리기무아문을 설치하고, 그 밑에 사대·교린·군무·변정·통상 등 12사를 두어 각기 사무를 나누어 보게 하였다"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3. 임오군란과 갑신정변의 정치적 변동

개화정책의 추진 과정에서 조선 사회 내부의 갈등이 폭발했습니다. 1882년 임오군란은 "훈련도감에서 해고된 구식 군인들의 13개월 동안 체불된 임금을 정부가 저급 불량쌀로 지급하여 일어난 난"이었습니다. 이 사건은 단순한 군사반란을 넘어서 "전임 선혜청 당상 김보현, 당시 선혜청 당상 겸 병조판서 민겸호, 선혜청 창고지기인 그 수하의 착복 비리와 부정 축재 사실까지 드러나며 관련자들이 살해됐다"고 기록되어 있어, 민씨 척족 정권의 부패에 대한 민중의 분노가 폭발한 사건이었습니다.

 

임오군란의 결과로 "중전 민씨를 놓친 데다가 조선 조정의 요청으로 청나라군이 개입하며 진압됐다"라고 하며, "흥선대원군은 톈진으로 끌려가고 척화파들은 제거됐으며, 청나라와 결탁한 중전 민씨가 충주에서 환궁하면서 민씨 외척들이 조정을 완전히 장악했다"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로써 청나라의 조선에 대한 내정간섭이 본격화되었고, "청나라는 자국인 마젠창과 독일인 묄렌도르프 등 '고문'이라는 이름을 붙인 30여 명을 앞세워 조선의 내정에 본격적으로 간섭했다"라고 합니다.

 

2년 후인 1884년 갑신정변은 이러한 청나라의 내정간섭에 반발한 급진개화파의 쿠데타 시도였습니다. "김옥균·박영효·서재필·서광범·홍영식 등 개화당파들이 청나라에 의존하는 척족 중심의 수구당을 몰아내고 개화정권을 수립하려 하였다가 청나라군의 개입으로 실패한 쿠데타 사건"이었습니다. 개화파는 "중국 간섭 배제, 문벌과 신분제 타파, 능력에 따른 인재 등용, 인민 평등권 확립, 조세 제도 등의 개혁 정책을 내놓았다"고 하지만, "위안스카이가 이끄는 청나라의 군대 1,500명이 창덕궁 안으로 진입함으로써 3일 만에 진압되었다"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4. 동학농민운동과 열강의 각축

1894년 동학농민운동은 조선 근대사에서 가장 큰 규모의 농민운동이었습니다. 이 운동은 "전라도 고부군에서 일어난 민란에서 비롯되었다"라고 하며, 직접적인 원인은 "고부군수 조병갑의 지나친 가렴주구에 항거하는 광범한 농민층의 분노가 폭발하여 민란이 일어났다"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특히 "만석보의 개수문제에 따르는 수세징수사건에서 비롯되었다"라고 하며, 조병갑이 "필요하지도 않은 신보를 쌓게 하고 이를 이유로 농민들에게서 고율의 수세를 징수함으로써 700여 섬이나 착복하였다"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동학농민운동은 단순한 반봉건 투쟁을 넘어 반외세 투쟁의 성격도 가지고 있었습니다. "전봉준·손화중·김개남의 이름으로 된 무장동"에서 발표된 창의문에서는 "탐관오리의 숙청과 보국안민에 있음을 천명"했습니다. 이 운동은 전라도 광주 지역에서도 "강대열, 박성동, 김우현 등이 농민군을 이끌고 참석하였다"고 하며, "손화중과 최경선이 광주 지역을 통할하였다"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동학농민운동은 열강들의 조선 진출을 가속화시키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1894년 조선에서 동학농민운동이 확산하자 조정은 청에 군사 지원을 요청했다. 이를 빌미로 일본은 자국민 보호를 앞세워 조선에 병력을 파견했다"고 하며, 이로 인해 청일전쟁이 발발하게 되었습니다. 청일전쟁의 결과 일본이 승리하면서 조선에 대한 일본의 영향력이 급속히 확대되었고, "삼국간섭"이라는 국제정치적 사건을 통해 "러시아·프랑스·독일 세 열강은 청일전쟁 승리로 랴오둥반도를 점령한 일본에 압력을 가해 이를 반환하게 했다"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5. 조선 근대화의 의미와 교훈

19세기 후반 조선의 개항과 근대화 과정은 전통사회에서 근대사회로의 험난한 전환 과정이었습니다. 강화도 조약으로 시작된 개항은 조선이 "점차 세계 무대에 등장하는 계기가 되기도 하였으나, 불평등 조약이었기에 일본의 식민주의적 침략의 시발점이 되었다"고 평가됩니다. 이 시기 조선은 흥선대원군의 쇄국정책에서 고종의 개화정책으로의 급격한 전환을 겪으면서 사회 각 층의 이해관계가 충돌하는 격동기를 경험했습니다. 임오군란과 갑신정변은 이러한 내부 갈등의 폭발이었으며, 동학농민운동은 농민층의 자발적인 근대화 의지를 보여준 역사적 사건이었습니다. 그러나 청나라, 일본, 러시아 등 열강들의 치열한 각축 속에서 조선은 자주적 근대화보다는 외세 의존적 근대화의 길을 걸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는 오늘날 우리에게 국가의 자주성과 주체적 발전의 중요성을 일깨워주는 소중한 역사적 교훈이 되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