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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철의 왕국 가야, 임나일본부설 및 금관가야와 대가야의 경쟁과 교류

by urongstory 2025. 5. 21.

철의 왕국 가야, 임나일본부설 및 금관가야와 대가야의 경쟁과 교류에 대한 역사적 고찰입니다. 가야가 철을 통해 번영했던 역사와 임나일본부설의 허구성, 금관가야와 대가야의 관계를 살펴보며 한반도 남부의 철기 문화가 어떻게 발전했는지 알아봅니다.

철의 왕국 가야, 임나일본부설 및 금관가야와 대가야의 경쟁과 교류
철의 왕국 가야, 임나일본부설 및 금관가야와 대가야의 경쟁과 교류


1. 가야, 철의 왕국으로 불리는 이유

한반도 남쪽의 부족국가였던 가야는 '철의 문화가 꽃피운 왕국'으로 불립니다. 고대 사회에서 철은 획기적인 발명품이었으며, 철로 만든 무기는 구리나 청동기보다 훨씬 뛰어난 성능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삼국지' '위서 동이전'에는 "나라에서 철을 생산하는데, 한, 예, 왜가 모두 와서 얻어갔다. 장사를 지낼때는 철을 사용하는데, 마치 중국에서 돈을 사용하는 것과 같다"라는 기록이 있습니다. 이는 가야에서 생산된 철이 평양 인근의 낙랑군, 황해도 일대의 대방군, 한반도 남쪽의 삼한 부족, 동해안 부족은 물론 멀리 일본까지 수출되었음을 의미합니다. 가야는 철의 왕국이자 무역대국이었던 것입니다.

가야 유적지에서는 철이 녹아내린 흔적이 곳곳에서 발견되었습니다. 경남 성산의 패총에서는 야철 송풍관, 노지 철재, 쇳물이 흘러내리도록 한 경사지 홈통 등이 발굴되어 이 지역에서 철 생산이 활발했음을 보여줍니다. 철 생산을 위해서는 양질의 철광석대량의 목탄, 그리고 이를 다룰 수 있는 전문 기술자들이 필요했습니다. 이처럼 복잡한 생산 과정을 통해 가야는 철기 문화를 발전시켰으며, 이것이 가야의 번영을 이끈 원동력이 되었습니다.


2. 금관가야의 번영과 쇠퇴

금관가야는 1세기 중엽부터 4세기 말까지 전기 가야 연맹의 맹주로서 현재의 경남 김해 지역을 중심으로 번성했습니다. '금관가야'라는 이름에서 '금(金)'은 '쇠'를 의미하며, 이는 금관가야가 '쇠나라'임을 나타냅니다. 가야 창건자인 김수로왕의 성씨 '김(金)' 역시 '쇠'를 의미하는데, 이는 김수로왕의 부족이 철을 다루는 '단야족(鍛冶族)'이었음을 암시합니다.

금관가야는 초기 신라와의 전투에서 승리하고 탈해 이사금에게 도움을 줄 정도로 강한 국력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낙동강 하구의 권리를 확보한 금관가야는 변한계 국가들을 결집하는 한편, 해상무역을 기반으로 동아시아 해상무역의 허브로 발전했습니다. 특히 해상 교통을 이용해 북쪽의 낙랑과 왜의 규슈를 연결하는 중계 무역이 발달했습니다.

그러나 금관가야는 4세기 말 백제, 왜와 연합하여 신라를 공격하다가 400년에 고구려 광개토대왕의 남정으로 큰 타격을 입었습니다. 이로 인해 가야 연맹이 약화되었고, 5세기 중반부터는 고령 지역의 대가야가 가야 연맹의 새로운 맹주로 부상하게 됩니다. 금관가야는 세력이 약화되어 소국으로 간신히 명맥만 유지하다가 결국 532년 금관가야의 구형왕이 신라에 투항하면서 멸망했습니다.


3. 대가야의 부상과 가야 연맹의 변화

5세기 중반부터 고령 지역을 중심으로 한 대가야가 가야 연맹의 새로운 맹주로 등장했습니다. 금관가야가 쇠퇴한 이후 대가야는 가야 연맹의 중심세력으로 성장했으며, 이 시기를 후기 가야 연맹이라 부릅니다. 대가야의 부상은 철광 개발과 철 생산의 확대에 기반했습니다. 대가야 주변에는 야로철산(합천군 야로면), 황산철산, 척지산철산(산청군), 모대리, 사철광 등 다양한 철산이 있었고, 이는 대가야의 성장에 중요한 배경이 되었습니다.

대가야는 5~6세기 무렵 고대 국가로 성장할 수 있었는데, 이는 가야산 남서쪽에 분포하는 철산 개발을 통한 활발한 철의 제련과 생산이 크게 작용했습니다. 대가야는 철제무기의 대량생산으로 강병을 육성했고, 농사에도 우수한 철제 농기구를 활용하여 생산력을 높였습니다. 그리고 이런 강한 군사력과 경제력을 바탕으로 주변 지역으로 세력을 확장해 나갔습니다.

그러나 대가야도 결국 신라의 세력 확장에 밀려 멸망하게 됩니다. 532년 금관가야의 구형왕이 신라에 투항한 것을 시작으로 가야 연맹은 서서히 신라에 편입되었습니다. 가야 귀족들은 신라의 진골로 편입되어 여전히 세력을 유지했으며, 이는 나중에 김유신 등이 신라 정계로 진출하는 기반이 되었습니다.


4. 임나일본부설과 가야사의 왜곡

임나일본부설은 4~6세기에 일본의 야마토 정권이 한반도 남부 임나(=가야) 지역에 통치기구인 '임나일본부'를 설치하여 직접 지배했다는 주장입니다. 이 학설은 일본이 한반도 침략을 정당화하기 위해 조작한 것으로 밝혀졌습니다. 임나일본부설의 핵심은 '임나=가야설'입니다. 임나라는 지명을 가야와 동일시함으로써 일본이 가야를 지배했다는 주장을 펼친 것입니다.

이 설은 처음부터 일본군 참모본부가 조선을 침략하기 위해 조작한 정치선전으로, 학문적인 접근을 요하는 학설이 아닙니다. 구한말 일본군 참모본부는 조선 침략의 명분을 확보하기 위해 에도시대 말기 일본 국학자들의 임나=가야설에 주목했습니다. '일본서기' 기사에 등장하는 임나를 가야로 보고 고대에 야마토왜가 한반도 남부를 지배했다는 이 사이비학설을 조작해 낸 것입니다.

2010년 한일역사공동연구위원회는 임나일본부의 존재 자체가 없었다는 데 의견을 같이했습니다. 현대 학계에서는 임나일본부설을 부정하며, 오히려 고구려, 백제, 신라, 가야가 일본 열도 내에 두었던 조선분국이 있었다는 '분국설'이 제기되고 있습니다. 이는 한반도에서 일본으로의 문화 전파 및 영향력 행사가 있었음을 시사합니다.


5. 가야의 철기 문화와 그 유산

가야의 철기 제조 기술은 매우 발달했습니다. 초기에는 섭씨 1000도 전후의 화력으로 연철을 만들고 단련시켜 단철을 생산했으나, 이후에는 섭씨 1200도 이상의 고온으로 초강법을 사용해 대량생산이 가능해졌습니다. 부산 복천동 유적에서는 철모, 철부, 철정, 철판 등이 대량으로 발굴되었으며, 부산 오륜대에서 발견된 주철제품인 철부는 완전한 용융 상태에서 주조된 것으로 확인되었습니다.

김해 지방에서는 철제도구와 왕망전 등의 화폐와 함께 탄화미가 출토되었는데, 이는 철제도구가 농업생산력을 발전시키는 원동력이 되었음을 보여줍니다. '삼국유사' 에 따르면 수로왕이 왕도를 건설할 때 농한기를 이용했다는 기록이 있는데, 이는 당시 벼농사 등 농업이 주된 생업이었음을 암시합니다.

가야의 철기 문화는 농업 생산력을 비약적으로 향상시켰고, 군사력 증강에도 크게 기여했습니다. 갑옷과 투구, 말의 갑옷을 비롯한 다양한 무기들이 생산되었으며, 이를 통해 가야는 강한 군사력을 갖출 수 있었습니다. 또한 가야의 철기 기술은 일본에까지 전파되어 동아시아 철기 문화 발전에 중요한 역할을 했습니다. 가야는 비록 신라에 흡수되어 독자적인 국가로 발전하지 못했지만, 그 철기 문화의 유산은 한반도 역사에 깊은 자취를 남겼습니다.